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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기억을 걷는 하루 | 신흥동일본식가옥, 심리서점 쓰담, 옛군산세관, 먹방이와친구들

by faith.log 2026. 4. 30.

군산의 기억을 걷는 하루


여행을 하다 보면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러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군산을 여행한다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만나보는 것도 좋다. 군산이 간직한 과거의 기억들을 따라 걸으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 현재 그 공간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군산이라는 도시를 지금의 모습만이 아닌 과거의 모습으로까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을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군산은 역사를 박물관에 가두는 도시가 아닌 역사를 살아내는 도시이다. 군산에서는 과거가 현재와 같은 주소를 쓴다. 오늘 spot.log에서 소개하는 장소들은 모두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했던 곳이다. 하지만 그 쓰임의 방식은 장소마다 다르고, 그 차이 속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집은 주인보다 더 오래 산다 - 신흥동 일본식 가옥

신흥동은 군산의 다양한 기억이 집결한 곳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물들이 골목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곳이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다. 골목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바라보게 되는 그곳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일제강점기 군산의 유명한 포목상이었던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1925년에 지은 적산가옥이다. 이 주택이 위치한 신흥동 일대는 당시 군산 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부유층 지역으로, 이런 건물들이 여럿 남아 있다. ㄱ자 모양으로 맞붙은 건물 두 채 사이에는 일본식 정원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으며, 1층에는 온돌방과 부엌, 식당, 화장실이, 2층에는 다다미방 두 칸이 있다.
 
방문하는 순간, 마치 일본 어딘가로 건너온 듯한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실제로 이 분위기 덕분에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범죄와의 전쟁〉 등 다수의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그런데 건물 구성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층위가 보인다. 1층엔 온돌방, 2층엔 다다미방. 지배자는 위층에서 다다미를 밟았고, 조선의 바닥난방은 아래층에 배치되었다. 건축의 배치 자체가 식민 구조의 축소판이다. 이 건물의 주인이 그 구조 안에서 재산을 모았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히로쓰는 사라졌다. 해방과 함께 재산은 몰수되고, 가옥은 한국제분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나 집은 남았다. 주인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건물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식민시대의 기억도, 해방 이후의 기억도, 오늘날 관광지가 된 기억도 모두 품은 채로 말이다.


마음을 쓰다듬는 자리 - 심리서점 쓰담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 나와 3분 정도 걸으면 골목 안쪽에서 심리서점 쓰담을 만나게 된다. '쓰담'이라는 이름은 '쓰다듬다'에서 왔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기억이 켜켜이 쌓인 군산의 골목에서, 개인의 마음을 쓰다듬는 공간이 독립서점의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쓰담은 심리 전문 서적 큐레이션과 심리검사, 심리상담, 북클럽을 함께 운영하는 독립서점이다.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사람을 잇는 곳이라는 점이 이 서점의 특징이다. 알고리즘이 아닌 책방지기가 지금 이 시대를 읽고 건네는 책, 그것이 이 서점이 말하는 위로의 방식이다.
 
공간 자체도 인상적이다. 목재로 지어진 건물과 내부의 나무 책상, 의자, 책장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1층과 2층은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1층이 감성적인 전시 공간에 가깝다면 2층은 마치 동아리방이나 친한 친구 집처럼 아늑하다. 1층에는 작은 정원이, 2층에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야외 공간이 있어 책 한 권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다.
 
이색적인 큐레이션을 경험하든, 심리검사나 상담을 받든, 그냥 공간을 즐기든. 쓰담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쉼이다.


아름다운 건물, 슬픈 기억 - 옛군산세관

심리서점 쓰담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이동하면 독특한 건물 하나가 눈앞에 나타난다. 옛군산세관이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벨기에산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로 지어진 이 건물은 서울역, 한국은행 본관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지붕은 고딕 양식,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유럽 건축 양식을 융합한 근대 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닌다.
 
실제로 옛군산세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건물이다. 주변 풍경 사이에서 더욱 이국적으로 빛나며, 일본 기타큐슈 모지코 레트로에 있는 구세관 건물과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곳의 기억은 건물만큼 아름답지 않다. 군산항은 쌀을 비롯한 물자 수탈의 창구로 기능했던 곳이다. 그 슬픈 역사는 지명에도 새겨져 있다. 이곳의 지명은 '장미동(藏米洞)', 쌀을 숨겨두고 쌓아두던 곳이라는 의미다. 수탈의 현장이 지명으로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옛군산세관 하나에 유럽, 일본, 조선이 얽혀 있다. 독일인 혹은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산 자재로 짓고, 일본 제국이 발주했으며, 조선의 쌀이 이 앞에서 배에 실렸다. 제국주의 시대의 복잡한 역학이 건물 하나에 압축되어 있다.
 
현재 이 건물은 호남관세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약 1,400여 점의 세관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세관복 변천사와 세관원 복장 체험도 가능하다.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건물의 아름다움을 살피고, 현재의 쓰임새까지 돌아보는 것. 한 장소에서 여러 시대의 기억을 동시에 만나는 경험이다.


수탈의 창고가 상생의 공간으로 - 인문학창고 정담 & 먹방이와 친구들

오늘의 마지막 장소는 옛군산세관 건물 뒤편에 위치한 인문학창고 정담,먹방이와 친구들이다. 1908년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세관 창고를 복합 문화공간으로 바꾸어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카페테리아와 제빵 공간, 다양한 소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군산 내 목공소, 캔들샵, 의류 공방 등 여러 업체와 협업하여 상생 기업으로 운영된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가장 오래된 건물 속 카페'라는 컨셉으로 운영 중인 이곳은, 창고라는 출발점이 만들어내는 레트로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벽 한 면 전체가 책장으로 채워져 있다. 1층에는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2층에는 성인을 위한 책들이 놓여 있어, 어른과 아이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도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북카페에 앉아 오늘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수탈의 역사를 새기고 있던 그 창고가 이제는 지역 업체들의 상생의 장이자, 모두가 함께하는 일상의 공간이 되어 있다.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자리 위에서 더 나은 현재를 만들어가는 것. 군산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었다.


군산은 과거를 지우지 않았다. 위에 현재를 얹었다.

지배자의 집이었던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는 제국이 살았던 공간과 그 구조를 마주했다. 마음을 쓰다듬는 서점 쓰담에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치유의 공간을 만났다. 수탈의 관문이었던 옛군산세관에서는 역사의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 창고 자리에 들어선 먹방이와 친구들에서는 역사가 일상이 된 공간을 경험했다.
 
가볍게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여행도 좋다. 그러나 그 장소들이 간직한 기억을 따라 걷는 여행은 조금 다른 무언가를 남긴다. 이 곳, 군산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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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일상을 잇는 기록. 작은 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삶의 깊이를 나누는 온라인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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