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신학사상 ① 성경론: 오직 성경, 하나님을 바로 보게 하는 안경

지난 두 편의 root.log에서는 존 칼빈의 생애를 따라가 보았다. 이번 글부터는 그의 신학으로 걸음을 옮겨, 첫 주제로 칼빈의 성경론을 다룬다. 성경론은 칼빈 신학 전체의 출발점이다. 그가 하나님과 인간, 구원과 교회에 대해 말한 모든 내용은 '성경은 무엇이며 어떤 권위를 갖는가'라는 질문 위에 서 있다. 마침 이 글이 실리는 오늘은 한국 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기념주일이며, 엿새 뒤인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일이다. 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되찾으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기에 이보다 알맞은 때는 없다.
칼빈은 '오직 성경'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칼빈의 성경론을 이해하려면 같은 시대 개혁자들의 자리를 함께 보는 것이 좋다. 루터는 성경과 교회 전통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싸웠고, 그 싸움 끝에 성경이 전통 위에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기독교 인문주의의 훈련을 받은 츠빙글리는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정신으로 성경에 다가갔다. 그에게 성경은 후대에 덧붙은 전통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고 내용적으로 더 확실한 증언이었으며, 따라서 신앙의 유일한 기초였다.
칼빈 역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자리에 굳게 섰다. 다만 그는 성경의 권위를 선언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이 왜 성경 없이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칼빈에 따르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Sensus Divinitatis)이 새겨져 있으며, 이 자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또한 창조 세계 곳곳에 자신의 영광을 분명하게 새겨 두셔서,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게 하셨다.
문제는 인간 편에 있다. 죄로 어두워진 인간은 마음에 새겨진 지식을 억누르고, 창조 세계가 증거하는 하나님 대신 스스로 만든 우상과 환상을 섬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거짓 신들과 구별하여 참되게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칼빈은 이 진리를 안경에 빗대어 설명한다.
"가령 노인이나 눈이 흐린 사람, 혹은 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에게 아무리 훌륭한 책을 내어놓는다 해도 그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책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눈이 흐리기 때문에 두 단어도 연달아 읽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경의 도움을 받으면 아주 또렷하게 그 책을 읽어 내려갈 수가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관한 갖가지 혼란스런 지식을 우리 마음에 제대로 모아주며, 우리의 우둔함을 몰아내고, 참되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 (《기독교 강요》 1권 6장 1절)
성경의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칼빈은 당시 성경을 잘못 이해한 두 진영에 분명하게 맞섰다. 첫 번째는 로마 가톨릭이다. 로마 가톨릭은 어떤 책이 정경에 속하는지를 교회가 결정했으므로, 성경의 권위 역시 교회의 승인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다. 교회가 성경을 인정했으니 교회의 권위가 성경보다 앞선다는 논리다.
칼빈은 이 주장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경이 권위를 얻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처음부터 스스로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교회는 그 권위를 알아보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우리 마음에 심어 주는 것도 교회의 결정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증거다.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읽는 이의 마음에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확증하신다.
칼빈은 여기에 성경 자체의 증언을 더한다. 바울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에베소서 2:20). 사도와 선지자의 가르침이 교회의 터라면, 그 가르침은 교회가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권위를 지니고 있었어야 한다. 터가 건물보다 먼저 놓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교회가 성경을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를 세웠다.
성령은 성경을 떠난 새 계시를 주지 않으신다

두 번째는 열광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성령의 직접 계시를 내세우며 성경을 '죽은 문자'로 여겼고, 성경을 읽는 일조차 낮은 단계의 신앙으로 취급했다. 성경을 붙드는 성도들의 단순한 신앙은 그들에게 조롱거리였다. 칼빈은 이들을 광란에 사로잡힌 광신자들이라 부르며 단호하게 맞섰다.
칼빈의 반론은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출발한다. 바울은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올라가는 체험을 했지만(고린도후서 12:2), 그 뒤에도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을 받기를 멈추지 않았다. 또한 그는 탁월한 교사였던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는 일에 전념하라고 권면했다(디모데전서 4:13). 가장 깊은 영적 체험을 한 사도조차 성경을 떠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그 누구도 성령을 핑계로 성경을 넘어설 수 없다. 칼빈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내거나 어떤 새로운 종류의 교의를 조작해 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인정된 복음의 교의에서 떠나게 만드는 그런 분이 아니시고, 오히려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시되는 바로 그 교의를 우리 마음에 인쳐 주시는 그런 분이신 것이다.”
- (《기독교 강요》 1권 9장 1절)
칼빈은 말씀과 성령을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빈은 성경관의 본질에서 일치한다. 두 사람 모두 성경을 신앙과 삶의 최종 권위로 고백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강조점에는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was Christum treibet)'를 성경을 읽는 핵심 잣대로 삼았다. 복음과 그리스도가 그의 해석의 중심축이었고, 이 기준 때문에 그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르기도 했다.
칼빈은 율법이든 복음이든,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전체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았다. 성경의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덜 권위 있지 않다. 그가 평생에 걸쳐 성경 대부분의 책을 주석하고 강해한 것도 이 확신에서 나온 열매다.
무엇보다 칼빈은 말씀과 성령의 균형을 끝까지 붙들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말씀은 우리 마음에 닿지 않고, 말씀을 떠난 체험은 길을 잃는다. 그래서 칼빈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내적 조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성령께서 마음을 비추시기 전까지 우리는 의심의 바다 위를 표류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펼치는 성도가 먼저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의 후예는 다시 성경 앞에 서야 한다

칼빈의 성경론은 500년 전 논쟁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성경보다 전통과 관습을 앞세우는 목소리가 있고, 신비한 체험과 감정을 앞세우며 성경을 가볍게 여기는 흐름이 있다. 칼빈이 맞섰던 두 극단은 모습만 바꾸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교회를 다시 성경 앞에 세운 운동이었다. 칼빈이 붙든 것은 새로운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아, 필자는 우리 각자가 두 가지 질문 앞에 서기를 바란다. 나는 전통이나 체험보다 성경을 더 높이 두고 있는가. 성경을 펼칠 때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기도하고 있는가. 개혁된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는 고백은 바로 이 자리, 성경 앞에서 시작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된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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