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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교회를 함께 개혁한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

by faith.log 2026. 6. 25.

사회와 교회를 함께 개혁한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

root.log에서는 계속해서 종교개혁과 관련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스위스 취리히의 대표적인 종교개혁가인 울리히 츠빙글리를 소개한다. 16세기 초 인문주의자들은 고전문학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서를 읽어가는 가운데, 당시 교회가 분명히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두 부류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질서 안에 머물면서 내부 개혁을 추구했던 에라스무스 같은 이들이 있었고, 반대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완전한 변혁을 요구했던 이들도 있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울리히 츠빙글리는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취리히라는 도시 전체를 무대로 교회와 사회를 동시에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가였다.


인문주의의 요람에서 자란 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의 행정관이었고 가정은 유복했다. 덕분에 츠빙글리는 6세부터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10세에는 바젤의 라틴어 학교로, 12세에는 베른으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다. 베른에서는 인문학자 하인리히 뵈플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00년부터 1502년까지는 비엔나 대학에서 수학하며 인문주의의 영향 아래 신앙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깊이 탐구했다. 이후 알프스 이북에서 르네상스 운동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바젤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504년에 인문학 학사를, 1506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글라루스 교구 사제로 임명받았다. 이곳에서 10년 동안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한 그는 에라스무스의 작품에 몰두하며 영향력 있는 설교자로 성장했고, 북부 소수 인문주의자 그룹에서 존경받는 일원이 되었다.
 
1510년 츠빙글리는 〈황소의 우화〉를 통해 스위스의 외교 정책과 용병 정책에 대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우화에서 그는 스위스 연방공동체가 한결같이 교황 편에 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일로 교황으로부터 포상으로 해마다 50굴덴(현재 한화 약 2,700만 원 상당)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전장에서 싹튼 개혁의 내면

츠빙글리는 1513년과 1515년 두 차례에 걸쳐 지역 출신 젊은이들과 함께 용병으로 노바라 전투에 참전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직접 겪으면서 그는 용병 제도에 깊은 회의를 품게 되었고, 그 폐지를 촉구하며 평화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전장의 경험은 그의 내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에라스무스를 통해 성경의 권위와 올바른 성경 해석 방법을 배웠고, 실천적 기독교를 지향하는 윤리 의식을 갖추어 갔다. 평화 사상과 설교의 중요성, 나아가 교회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특히 에라스무스가 1516년에 편찬한 《헬라어 신약성경》을 접하면서 성경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열렸다. 신약성경이 그려내는 교회와 성도들의 삶이 로마 가톨릭의 신앙 행습과 얼마나 큰 괴리를 보이고 있는지, 그는 성경 본문 앞에서 그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1518년 12월 27일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청빙을 받은 츠빙글리는 1519년 1월 1일부터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했다. 취리히에 부임할 무렵 그는 이미 루터와 유사한 신학적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다만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의 개혁 정신은 인문주의적 방법론에 근거한 부지런한 성경 연구, 당시 교회를 물들인 미신에 대한 분노, 성직자의 부정과 부패에 대한 비판, 그리고 용병 제도에 대한 저항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초대교회 신앙 공동체를 모범으로 삼아 도덕적 정결함을 함께 가르쳤고, 사제들의 도덕적 타락과 성자 숭배 관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흑사병, 그리고 인문주의와의 결별

1518년 8월 흑사병이 취리히를 비롯한 스위스 북부 지방을 휩쓸었다. 츠빙글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았으나 자신도 결국 1519년 9월에 감염되어 거의 1년 동안 죽음의 문턱에서 사투를 벌였다.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이듬해인 1520년 동생 안드레아스를 같은 병으로 잃었다. 이 일련의 고난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깊이 경험했고,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겠다는 헌신을 새롭게 다짐했다. 그리고 교황에게서 받던 연금도 거절했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그는 인문주의적 개혁 노선과도 결별했다. 인문주의자들이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개혁을 추진하자고 주장할 때, 츠빙글리는 참된 권위는 오직 성경에서만 온다고 선언했다. 권위의 원천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결국 그를 인문주의자들의 진영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이것은 훗날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향한 그의 명확한 결단이었다.


소시지 사건: 종교개혁의 도화선

1522년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도화선이 된 것은 사순절 첫 주일인 3월 9일 저녁에 일어난 이른바 '소시지 사건'이었다. 사순절 기간에 츠빙글리를 비롯한 그로스뮌스터 교회 지도자들 12명이 스위스 독일어 성경 출판을 위해 인쇄업자 크리스토퍼 프로샤우어의 집에 모여 작업을 하던 중 돼지고기 소시지를 야식으로 먹었다. 츠빙글리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나 실제로 소시지를 먹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의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콘스탄츠 대주교는 취리히 시의회에 소시지를 먹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투옥시키도록 요구했다.
 
츠빙글리는 시의회의 조치에 항의하며 1522년 3월 23일 사순절 세 번째 주일에 금식 규례 문제를 주제로 설교했고, 부활절 직후인 4월 16일에 이 설교를 〈자유와 음식의 선택에 관하여〉라는 글로 출판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사순절 기간의 금식 문제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판단해야 하며, 이 기간에 고기를 먹는 것이 죄라고 단정할 수 없고 따라서 성경적 처벌 근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 가운데 금식 기간에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그 자유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절제해야 하고 공공질서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설교와 글은 취리히 개혁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도화선이 되었다.


성경의 권위로 취리히를 변혁하다

1522년 7월 2일, 츠빙글리는 10명의 동료 사제들과 함께 콘스탄츠 주교에게 복음에 대한 자유로운 설교 보장과 성직자 독신 제도 폐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공개 서한으로 제출하였다. 같은 해 여름, 프라우뮌스터 교회에서 탁발수도회 수도사 람베르트가 마리아와 성자들에 관해 전통적인 가톨릭의 관점으로 강론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하여 강론을 듣던 츠빙글리가 "형제여, 네가 틀렸다!"라고 크게 외치면서 자리는 즉시 공개 신앙 토론회로 이어졌다. 취리히 시의회는 7월 21일 탁발수도회 수도사들에게 앞으로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설교하도록 지시했고, 이로써 츠빙글리의 견해가 옳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같은 해 9월에는 〈영원히 순수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설교〉를 통해 마리아 숭배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츠빙글리가 출판과 설교를 통해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면서 취리히는 개혁의 찬반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에 시의회는 1523년 1월 20일 공개 토론회를 소집했다. 츠빙글리는 이 토론을 위해 자신의 개혁 사상을 간결하게 정리한 〈67개 조항〉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성경 중심적인 신앙의 회복을 강조하며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임을 선포했고, 성직자의 결혼을 옹호했다. 이 모임은 취리히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 시대를 마감하고 개혁 교회가 새롭게 출발하는 역사적인 첫 자리였다.


칼을 들고 싸운 개혁자의 최후

취리히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확산되면서 스위스는 신앙적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은 츠빙글리의 개혁 사상을 수용했으나 산간 지대의 도시들은 로마 가톨릭에 충성을 지켰다. 이 종교적 분열은 내란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츠빙글리는 1529년 6월 군대를 이끌고 카펠로 진군하여 로마 가톨릭 주력 부대에 맞섰고, 가톨릭 도시들은 개혁 운동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신앙의 선택은 개인의 자유에 맡기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합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531년 10월 11일, 로마 가톨릭 5개 도시가 연합하여 취리히의 카펠로 진격해 들어왔다. 츠빙글리는 도시가 방어선을 갖출 시간을 벌기 위해 1,500여 명의 선발군에 합류하여 전선에 나아갔다가 목에 치명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고해 사제의 도움을 거절한 후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시신은 몇 토막으로 잘려 불태워졌고, 재는 배설물과 섞어 뿌려졌다. 개신교 성자의 유골이 수집되는 것을 막으려는 로마 가톨릭의 비열한 보복이었다.
 
츠빙글리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가 그로스뮌스터 교회를 담임하면서 종교개혁을 계승해 나갔다. 지금도 카펠에 서 있는 기념비에는 츠빙글리가 죽을 때 남겼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너희가 나의 몸을 죽일 수는 있을 것이나 나의 영혼은 죽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삶의 영역은 하나님의 것이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 층위의 도전을 던진다. 인간은 기득권을 내려놓기를 몹시 어려워한다. 그것이 과거에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을 통해서 얻게 된 권리라면 더욱 그렇다. 츠빙글리는 교황청으로부터 해마다 받던 2,700만 원 상당의 연금을 스스로 반납했고,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누리던 사회적 지위도 내려놓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성경의 권위였다. 물질적 가치와 사회적 지위 대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삶 자체가 웅변한다.
 
종교개혁은 신학 지식의 갱신에만 그치지 않는다. 츠빙글리는 그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그의 개혁은 교회의 담장을 넘어 사회, 국가, 일상의 모든 영역을 향했다. 전쟁 참여에 대한 부분은 분명 신학적 논쟁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그가 신앙의 원리로 삶의 모든 영역을 변혁하려 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역설한 영역 주권, 곧 이 세상의 어느 한 뼘도 "하나님의 것"이라 말할 수 없는 영역이 없다는 그리스도의 통치 선언과 정확히 맥을 같이한다. 츠빙글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지식의 개혁이 아니라 삶의 개혁, 곧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자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돌려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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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일상을 잇는 기록. 작은 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삶의 깊이를 나누는 온라인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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