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주의를 학문과 삶 속에 뿌리내린 사람, 존 칼빈 ②
지난 root.log에서는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감당했던 1차 사역까지 함께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 이후의 여정을 따라가며, 칼빈이 자신의 생애를 통해 개혁주의를 어떻게 학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뿌리내리게 노력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칼빈을 개혁주의 신학을 올바르게 세우고 체계화한 학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그 신학을 교회와 도시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제도로 세워 가기 위해 평생을 바친 목회자였다는 사실은 종종 잊곤 한다.
요나의 예 앞에서 칼빈은 다시 부르심에 순종했다

1538년 4월, 칼빈은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되면서 1차 사역을 마감했다. 이후 베른과 취리히를 거쳐 바젤에 머물던 칼빈에게,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개혁을 이끌고 있던 마르틴 부처가 초청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칼빈은 여러 차례 이를 거절했다. 그는 본래 조용히 연구하고 저술하며 학문으로 종교개혁을 돕기를 원했고, 제네바 사역이 외부의 힘에 의해 좌절된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부처는 일찍이 파렐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달아났던 요나의 예를 들며 칼빈을 강하게 압박했다. 훗날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이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마르틴 부처는 파렐이 내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나를 새로운 임지로 불렀다. 그가 내 앞에 내세운 요나의 예는 나를 완전히 굴복시켰고, 나는 다시 가르치는 직분을 받아들였다."
스트라스부르의 3년은 칼빈을 목회자로 빚어냈다

1538년 9월부터 칼빈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스트라스부르로 모여든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로 3년을 섬겼다. 1539년부터는 요하네스 슈투름이 세운 스트라스부르 김나지움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쳤다. 칼빈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한 교회를 온전히 책임지는 목회를 경험했다. 그는 프랑스어 시편 찬송을 엮어 회중이 함께 노래하게 했고, 예배 순서를 정비했으며, 성찬에 앞서 성도들의 신앙을 직접 살폈다. 제네바에서 이루지 못했던 개혁을 작은 피난민 교회 안에서 먼저 실천해 본 것이다.
1540년 8월, 칼빈은 부처와 파렐의 권유 속에 이델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다. 이델레트는 오늘날 벨기에 지역인 리에주 출신의 미망인으로, 재세례파였던 남편 장 스토르되르와 함께 칼빈의 가르침을 통해 개혁 신앙으로 돌아온 여인이었다. 결혼식 주례는 파렐이 맡았다. 이델레트는 154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칼빈의 신실한 반려자가 되었다. 이러한 삶의 안정은 칼빈의 학문적 작업에도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기독교 강요》 라틴어 제2판(1539)과 첫 번째 성경 주석인 《로마서 주석》(1540)을 출판했고,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다(1541).
한 편의 답신이 제네바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와 저술에 힘을 쏟는 동안 제네바의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칼빈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던 장 필립 일파는 1539년 베른과 제네바에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이듬해 이 세력은 무너졌고, 협상에 나섰던 이들은 반역죄로 정죄되었다. 칼빈에게 우호적인 이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고, 그들은 칼빈에게 제네바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제네바에는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왔다. 1539년 3월,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야코포 사돌레토가 제네바 시민들을 로마 교회로 다시 불러들이려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제네바에는 이에 맞설 만한 인물이 없었고, 결국 시의회는 칼빈에게 답변을 부탁했다. 칼빈은 귀환 요청은 거절했지만 답변 요청은 받아들여,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답신〉을 통해 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 답신이 탁월하다는 소식이 시민들 사이에 퍼지면서, 3년 전과 달리 칼빈을 지지하는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제네바는 여러 차례 칼빈의 귀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에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칼빈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이번에도 파렐은 강한 어조의 편지로 귀환을 독려했고, 부처 역시 제네바로 돌아가기를 권했다. 결국 칼빈은 일정 기간만 머물겠다는 조건으로 1541년 9월 제네바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일정 기간'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 동안 이어졌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 규범〉으로 개혁을 제도 위에 세웠다

스트라스부르에서의 3년은 칼빈을 한층 성숙한 목회자로 빚어냈다. 1차 사역 때 그는 파렐의 개혁을 돕는 조력자였지만, 이제는 스스로 개혁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 제네바에 돌아왔다. 그는 제네바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거룩한 도성으로 세우기를 원했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칼빈은 개혁이 지속되려면 무엇보다 튼튼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1537년에 제안했던 조항들보다 훨씬 구체적인 교회 헌법인 〈제네바 교회 규범〉을 작성했고, 1541년 11월 시의회의 인준을 받았다.
이 규범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라는 네 직분을 세우셨다고 선언하고 각 직분의 의무를 규정했다. 목사들은 매주 '콩그레가시옹(Congrégation)'이라 불린 모임에 모여 성경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했으며, 목사 후보자를 심사했다. 교사는 신자들에게 참된 교리를 가르치고 학교 교육을 책임졌다. 집사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병원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그중에서도 칼빈 제도의 핵심은 장로였다. 장로는 오늘날 당회의 기원이 되는 직분으로, 소의회에서 2명, 60인 의회에서 4명, 200인 의회에서 6명 등 모두 12명의 평신도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목사들과 함께 치리회인 '콩시스투아르(Consistoire)'를 구성하여 매주 목요일 모여 교회의 권징 문제를 다루었다.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출교를 선언할 수 있었고, 중대한 범죄는 시 당국에 넘길 수 있었다.
물론 이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출교권을 교회가 가져야 하는지 시의회가 가져야 하는지를 두고, 칼빈은 아미 페랭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다. 이 싸움은 1555년 1월 시의회가 치리회의 독자적인 출교권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일단락되었다. 그 사이 신앙 때문에 박해받던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혹은 종교개혁의 모범을 배우기 위해 제네바로 모여들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는 1556년 한 편지에서 제네바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곳은 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의 학교 가운데 가장 완전한 학교이다.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참되게 전파되고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삶과 신앙이 이처럼 진실하게 개혁된 곳은 아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개혁 신앙을 온 유럽으로 흘려보냈다

1559년, 칼빈은 마침내 제네바 시민권을 받았다. 20년 넘게 이 도시를 섬기면서도 그는 줄곧 이방인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조국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향해 있었다. 같은 해 칼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제네바로 온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훈련하기 위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웠다. 오늘날 제네바 대학의 전신이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경험했던 교육 방식을 본떠 아카데미를 세웠고, 개교 첫해에만 162명이 등록했다. 초대 원장으로는 테오도르 베자가 선출되었고, 칼빈은 교수진과 함께 신학을 가르쳤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루터파와 구별되는 개혁파 신학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수많은 목사가 프랑스를 비롯해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독일, 이탈리아 등지로 파송되었다.
칼빈의 영향력은 그의 생전에 이미 유럽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1559년 파리에서 열린 위그노 교회의 첫 전국 대회가 칼빈의 초안을 바탕으로 한 〈프랑스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배우며 피난민 교회를 목회했던 존 낙스의 주도로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저지대에서는 1561년 귀도 드 브레가 〈벨직 신앙고백〉을 작성했다. 독일의 팔츠 선제후령에서는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었고, 같은 해 잉글랜드 교회는 개혁파 신학의 영향을 받은 〈39개 신조〉를 채택했다. 스위스에서는 1549년 칼빈과 취리히의 불링거가 성찬론에 합의한 〈취리히 합의〉를 통해 제네바와 취리히가 하나의 개혁파 전통으로 묶였다.
칼빈은 연약한 몸으로 끝까지 말씀을 섬겼다

칼빈은 몸이 무척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편두통과 통풍, 신장결석, 폐결핵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렸고, 스스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그는 주일마다 두 차례, 격주로는 평일에도 매일 설교했고, 신학 강의를 쉬지 않았으며, 구약과 신약 대부분의 책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기독교 강요》를 거듭 개정하여 1559년 최종판을 완성했고, 수많은 논문과 서신으로 유럽 각지의 교회와 개혁자들을 섬겼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칼빈은 자신이 성인으로 추앙받거나 자신의 무덤이 순례지가 될 것을 염려하여, 묘비 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자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시편 39편 9절의 말씀을 되뇌며 하나님의 뜻 앞에 잠잠히 머물렀다. 그리고 1564년 5월 27일, 만 5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내가 잠자코 있으면서 입을 열지 않음은, 이 모두가 주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9:9, 새번역)
부르심 앞의 순종이 칼빈을 칼빈 되게 했다
칼빈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뜻대로 종교개혁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 점이다. 칼빈은 위대한 학자로서 학문을 통해 종교개혁을 돕고자 했고, 그 소망은 《기독교 강요》와 여러 주석과 논문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에서 직접 교회를 세우고 개혁을 이끄는 일은 그가 바랐던 길이 아니었다. 그는 그 부르심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파렐과 부처 같은 동역자들을 통해 그를 부르셨을 때, 칼빈은 결국 순종의 자리로 나아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사역자의 부르심을 마음속에 주어지는 내적 소명과 교회를 통해 확인되는 외적 소명으로 설명한다. 그의 생애는 이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칼빈 한 사람의 소원과 계획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교회와 동역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도 그의 길을 인도하셨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 애쓴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칼빈의 삶은 내가 잘하는 일, 내가 원하는 일만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으로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보여주실 때, 그것이 내가 계획한 길이 아닐지라도 칼빈처럼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에는 마음을 받쳐 든 손과 함께 "주님, 제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진실하게(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라는 고백이 새겨져 있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은 칼빈처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을 감당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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