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잡지와 책과 정물 앞에서
11월은 한 해의 끝을 미리 만져 보는 달이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교회는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며 지난 열 달을 되짚는다. 감사는 무엇을 받았는지 세는 일이기 전에 무엇을 보았는지 돌아보는 일이다. 보지 못한 은혜에는 감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달 view.log는 '바라보는 눈'을 주제로 네 곳을 골랐다. 고난 속에서 섭리를 읽어 낸 요셉의 이야기, 130년 동안 시대를 기록해 온 잡지들, 손으로 만든 책이 가득한 아트북페어, 그리고 평생 병과 그릇만 바라본 한 화가의 정물이다.
1. 〈요셉전〉 — 웃음 속에서도 섭리는 가볍지 않다

창세기의 요셉만큼 극적인 인물도 드물다. 아버지의 편애, 형들의 질투, 구덩이와 노예 시장, 억울한 옥살이, 그리고 애굽의 총리. 마당극 뮤지컬 〈요셉전〉은 이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당극 특유의 해학과 뮤지컬의 노래로 풀어낸다. 공연기획자 고요셉이 기획과 각색, 연출, 모든 곡의 작사와 작곡을 맡았고, 방송인 조혜련이 공동연출로 참여했다. 이 작품은 원래 무대 장비 없이 가림막과 소품만으로 교회를 찾아가는 마당놀이로 출발했다. 작은 교회가 비용 부담 없이 문화 공연을 열 수 있게 하자는 뜻이었고, 그 작품이 이번에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 공연 기간에는 미자립교회를 대상으로 선착순 무료 관람도 제공한다.
웃음이 앞서는 형식이지만 작품의 중심은 가볍지 않다. 제작진은 창세기 50장 20절을 작품의 축으로 삼았다. 형들이 악을 꾀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많은 생명을 살리셨다는 요셉의 고백이다(창세기 50:20). 각색 과정에서는 두 명의 목사에게 성경 해석과 설정을 감수받았다. 개혁신앙이 섭리 교리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문은 섭리를 아는 성도가 역경 속에서 인내하고 형통할 때 감사한다고 가르친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 고백을 한 사람의 생애로 보여 준다. 필자는 이 작품을 웃으며 보고 나서 지난 한 해의 구덩이들을 다시 떠올려 보기를 권한다.
- 공연 장소: 대학로 아트하우스 (서울시 종로구)
- 공연 기간: 2026년 11월 2일 ~ 12월 02일
- 공연 시간: 월, 화, 목, 금 19:30 / 수 16:00 / 토 14:00, 17:00 / 주일 15:00
2. 〈잡지가 문화다!〉 — 시대를 기록한 지면은 다음 세대의 증언이 된다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로 소개되는 《대조선독립협회회보》가 창간되었다. 올해 130주년을 맞아 한국잡지협회와 서울도서관이 근현대 잡지 특별전을 연다. 서울도서관 2층 로비의 〈잡지, 시대를 깨우다〉에서는 《대조선독립협회회보》를 비롯해 《소년》, 《개벽》, 《삼천리》, 《문장》, 《사상계》, 《창작과비평》 등 시대를 대표하는 잡지의 원본과 영인본 45종을 볼 수 있다. 디지털자료실에서는 지금 발행 중인 잡지 300여 종을 자유롭게 펼쳐 볼 수 있고, 전자잡지 체험존도 마련된다.
잡지는 한 시대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가장 빨리, 가장 생생하게 남기는 기록이다. 누가는 복음서를 시작하며 처음부터 모든 일을 자세히 살펴 차례대로 써 보내겠다고 밝혔다(누가복음 1:1-4). 기록하는 일은 신앙 공동체가 오래 지켜 온 소명이다. 필자 역시 매달 faith.log라는 작은 지면을 채우는 사람으로서, 130년 전의 누렇게 바랜 지면 앞에서 무엇을 기록할 가치가 있는지 다시 묻게 된다. 이 전시는 11월 15일까지로 기간이 짧으니 서둘러 찾기를 권한다.
- 전시 장소: 서울도서관 2층 로비, 디지털자료실(서울시 중구)
- 전시 기간: 2026년 10월 30일 ~ 11월 15일
- 관람 시간: 화~금 09:00~21:00 / 토일 09:00~18:00
3. 〈언리미티드 에디션 18 — 2026 서울아트북페어〉 — 손으로 만든 책은 만든 사람의 시선을 담는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2009년에 시작해 매해 열려 온 독립출판과 아트북의 축제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며, 해마다 2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는다. 지난해에는 해외 40팀을 포함해 역대 가장 많은 251팀이 참여했다. 올해 열여덟 번째 행사는 11월 6일부터 사흘 동안 같은 자리에서 열린다.
독립출판물은 판형과 종이, 제본과 서체까지 하나하나가 만든 사람의 결정이다. 그래서 이곳의 책들은 내용보다 먼저 만든 이의 시선을 보여 준다. 무엇을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는지, 그것을 어떤 모양으로 세상에 내놓고 싶었는지가 책의 물성 자체에 남는다. 그리고 이 행사의 가장 큰 기쁨은 그 책을 만든 사람과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직접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세기의 문화명령은 사람에게 세상을 가꾸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소명을 주었다. 한 권의 책을 손으로 엮어 내는 일도 그 소명의 작은 조각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잘 만든 책 한 권과 함께, 그 책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도 하나 들고 돌아오기를 권한다.
- 전시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서울시 노원구)
- 전시 기간: 2026년 11월 6일 ~ 11월 8일
- 관람 시간: 금 12:00~19:00 / 토일 10:00~18:00
4. 〈조르조 모란디〉 — 같은 사물을 오래 보는 일은 존재를 새로 보게 한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1890~1964)는 평생 볼로냐의 작은 작업실에서 병과 화병, 상자, 조개 같은 사물을 그렸다. 같은 대상을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그리면서도, 빛과 색의 농도와 사물 사이의 거리를 미세하게 조율해 매번 다른 화면을 만들었다. 더현대 서울 ALT.1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 이후 12년 만의 국내 단독전이다. 볼로냐의 모란디 미술관이 함께 기획했고, 상하이 푸동미술관 전시를 거쳐 서울 공간에 맞게 다시 구성했다. 유화와 수채화, 드로잉, 판화 등 원작 80여 점과 함께, 화가가 실제로 그렸던 병과 화병, 작업 공간을 담은 아카이브도 나온다.
모란디는 "현실보다 더 추상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다. 평범한 사물도 오래 바라보면 그 안에 숨은 질서와 무게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은 낯설지 않다. 칼빈은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이 펼쳐지는 극장이라 불렀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는 하찮은 것이 없고, 매일 손에 쥐는 그릇 하나에도 지으신 분의 질서가 깃들어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볼 만큼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란디의 정물 앞에서는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필자는 이 전시를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맞기 전에 보기를 권한다. 오래 바라보는 연습이 곧 감사하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 전시 장소: 더현대 서울 ALT.1(서울시 영등포구)
- 전시 기간: 2026년 11월 21일 ~ 2027년 3월 1일
- 운영 시간: 월~목 10:30~20:00 / 금~일 10:30~20:30
마무리하며
요셉은 구덩이 속에서 섭리를 읽어 냈고, 130년 전의 잡지들은 한 시대의 고민을 지면에 붙들어 두었다. 독립출판 제작자들은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을 손으로 묶었고, 모란디는 병 몇 개를 평생 바라보았다. 네 곳 모두 무언가를 오래 바라본 사람들의 흔적이다. 11월의 감사는 거창한 결산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지나쳐 온 것들 앞에 다시 멈춰 서는 데서 시작한다. 올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은혜는 무엇이었을까. 그 질문을 들고 천천히 걸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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