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10월 문화 행사 소식] 그림에서 활자로, 활자에서 복음으로
10월, 하늘이 높아지고 해가 짧아지면서 책장을 넘기는 손이 자연스럽게 느려지는 계절이다. 교회력으로 10월은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달이기도 하다. 1517년 10월 31일, 한 수도사의 문서가 교회 문에 붙은 이후 말씀은 활자를 타고 유럽을 건넜고, 수백 년 뒤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 이 땅의 항구에 닿았다. 이달에 모은 네 가지 이야기는 그림에서 시작해 활자를 지나 복음이 건너온 길로 이어진다. 예술의전당의 그림책 원화전에서 파주출판도시의 북마켓으로, 다시 금천의 작은 영상 라운지에서 부산 동래의 선교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1. 그림이 이야기를 이끄는 책 — 와일드스미스 그림책 원화전

그림책을 아이들의 읽을거리로만 여겨왔다면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층에서 그 생각을 바꾸게 된다. 영국 그림책 작가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1930~2016)는 존 버닝햄, 찰스 키핑과 함께 '영국 3대 그림책 작가'로 꼽힌다. 그는 45년 동안 80여 권의 그림책을 펴냈고, 그의 책은 37개국에서 번역되어 3,000만 부 넘게 팔렸다. 글을 설명하는 보조 수단에 머물던 삽화를 독립된 회화의 자리로 끌어올린 작가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 세계를 다룬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다. 800㎡ 공간에 약 300점의 작품이 놓였고, 원화의 상당수가 국내에 처음 공개된다. 1962년 케이트 그리너웨이상을 안긴 《ABC》 시리즈부터 말년의 작업까지 60여 년의 창작 여정을 한 동선 안에서 따라갈 수 있다. 출간 당시의 희귀 초판본도 함께 전시되어, 한 권의 그림책이 원화에서 인쇄물로 옮겨가는 과정을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다. 인쇄된 페이지에서는 보이지 않던 붓질의 층위와 수정의 흔적이 원화 앞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와일드스미스의 색채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한국 작가들의 작업, 대형 설치물과 체험형 공간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금빛 갈기의 사자와 보라색 소가 뛰노는 화면 앞에서는 어른도 아이도 같은 높이의 눈으로 그림을 보게 된다. 전시는 10월 중순에 막을 내리니, 이번 달 계획의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 행사 정보 >
- 전시 장소: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층(서울시 서초구)
- 전시 기간: 2026년 7월 7일 ~ 10월 16일(매주 월요일 휴관)
- 관람 시간: 오전 10시 ~ 오후 7시
2. 쓰고 다듬고 만들고 파는 모든 이들의 장터 — 2026 파주페어 북앤컬처 '북소리'

가을마다 파주출판도시는 책을 만드는 도시에서 책을 나누는 도시로 모습을 바꾼다. 2026 파주페어 북앤컬처는 10월 9일부터 18일까지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와 출판도시 일원에서 열리고, 그 가운데 책 축제 '북소리'의 핵심 프로그램이 마지막 사흘에 집중된다. 올해의 슬로건은 '난-것들'이다. 책을 쓰는 사람, 다듬는 사람,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을 모두 아우르겠다는 뜻이다.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북마켓 '난-장'이 그 슬로건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다목적홀에는 일반 출판사와 독립출판 제작자, 굿즈 제작자와 디자이너가 자리를 잡고, 지혜의숲 2관과 문발살롱에는 서점과 어린이 출판사, 파주 지역 책방들이 모인다. 대형 서점의 매대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작은 출판사의 책과 독립출판물을 한자리에서 고를 수 있다. 구매 금액 1만 원마다 스티커를 받아 개수에 따라 연필, 에코백, 티셔츠로 바꿔주는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다.
같은 기간 지혜의숲 1관에서는 '다음의 출판인'에게 전하는 아홉 편의 북토크가 이어진다. 첫날에는 구병모 작가가 《단지 소설일 뿐이네》를 매개로 계속 쓰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둘째 날에는 스토리지북앤필름을 비롯한 독립출판계의 오랜 운영자들이 지난 10여 년의 여정을 돌아본다. 마지막 날에는 이수지 작가가 파주의 책방 사람들과 함께 그림책의 문장을 낭독한다. 북토크는 사전 신청을 받으니 관심 있는 회차는 미리 신청해 두어야 한다. 앞서 소개한 와일드스미스 전시가 한 작가의 책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이 자리는 책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보여준다.
< 행사 정보 >
- 행사 장소: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및 파주출판도시 일원(경기도 파주시)
- 행사 기간: 2026년 10월 9일 ~ 10월 18일
3. 1,969장의 그림으로 밀려오는 파도 —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

와일드스미스의 원화에서 한 장의 그림이 한 권의 책이 되는 과정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수많은 그림이 모여 하나의 움직임이 되는 장면을 볼 차례다.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1층 플레이 라운지에서는 이우성 작가의 영상 작품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2021)가 상영되고 있다.
작품은 끝없이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를 1,969장의 그림으로 옮겨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팬데믹으로 모두의 발이 묶였던 시기, 작가는 뉴질랜드 바다의 풍경을 한 장씩 손으로 그려 이어 붙였다. 정지된 회화가 움직임으로 번져가는 화면 위로 피아니스트 어자혜의 즉흥 연주가 흐른다. 멈춰 선 시간 속에서 한 장씩 쌓아 올린 파도가 결국 하나의 바다가 된다는 사실은, 제목이 건네는 조용한 희망과 그대로 겹친다.
라운지는 곡선형 벤치와 빈백으로 꾸며져 있어 관람객이 편하게 앉거나 기대어 오래 머물 수 있다. 매주 토요일에는 작가의 제작 방식을 따라 OHP 필름 위에 자신만의 파도를 그려보는 워크숍이 열리며, 사전 신청 없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이 라운지는 서서울미술관이 금천 지역 문화예술공간 여섯 곳과 손잡고 시작한 첫 협력 사업이기도 하다. 관람은 예약 없이 무료이고, 전시는 10월 11일에 끝나니 이달 소개하는 네 자리 가운데 가장 먼저 찾아야 한다.
< 전시 정보 >
- 전시 장소: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1층 제3전시실(서울 금천구)
- 전시 기간: 2026년 9월 1일 ~ 10월 11일
- 관람 시간: 오전 10시 30분 ~ 오후 7시
4. 언제든, 어디서든 계신 분 —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 2026 특별전

마지막 발걸음은 부산 동래로 향한다.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은 초창기 선교사들을 통해 이 땅에 전해진 복음의 문화를 보존하고 나누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유산인 고성서를 비롯해 잡지와 사진 등 1,000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활자로 옮겨진 말씀이 바다를 건너 한국어 성경이 되기까지의 흔적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올해 특별전의 제목은 〈언제든, 어디서든〉이고, 영문 제목은 'Invisibly Visible, Unlocatably Everywhere'다. 보이지 않으나 드러나시고, 어느 한 곳에 계시지 않으나 모든 곳에 계신 분. 제목은 시편 기자의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갈 수 있으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9:7, 새번역) 지난해 기획전의 제목이 〈HIC ET NUNC 지금 여기〉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지금, 여기'에서 '언제든, 어디서든'으로 시선을 넓혀가는 두 해의 흐름이 읽힌다.
종교개혁 기념주일(10월 25일)이 있는 이달, 말씀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 손에 들려졌는지 되짚어 보기에 이보다 알맞은 곳은 드물다. 관람은 무료이며, 박물관이 방문 전 예약을 요청하고 있으니 누리집에서 예약 현황을 확인하고 신청해야 한다. 10월 3일(개천절)과 10월 9일(한글날)은 공휴일 휴관이다.
< 전시 정보 >
- 전시 장소: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부산 동래구)
- 전시 기간: 2026년 9월 13일 ~ 12월 31일(일,월,공휴일 휴관)
- 운영 시간: 오전 10시 ~ 오후 5시
마무리하며
10월은 깊어지는 계절이다. 잎의 색이 짙어지고 밤이 길어지면서, 오래 들여다볼수록 드러나는 것들에 눈길이 간다. 이달 소개한 네 자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깊이를 보여준다. 원화에 남은 붓질의 흔적에서, 작은 출판사의 매대 위에 놓인 한 권의 책에서, 한 장씩 쌓아 올린 그림이 이룬 파도에서, 그리고 바다를 건너온 낡은 성경의 활자에서.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이 가을, 우리 손에 들린 책 한 권이 어떤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 천천히 따라가 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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