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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 크리스마스 씰 한 장에 담긴 홀 가족 2대의 소명

by faith.log 2026. 10. 15.

강원도 고성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 크리스마스 씰 한 장에 담긴 홀 가족 2대의 소명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필자는 학창 시절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 표준어 '크리스마스실')을 사던 기억을 떠올린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크리스마스 씰을 사서 모음집에 한 장씩 더하는 일은 필자만의 성탄 의식이었다. 늘 두 장을 샀다. 한 장은 모음집에 끼우고, 다른 한 장은 성탄 카드를 보낼 때 우표 옆에 붙였다. 그러나 이 작은 종이 한 장을 누가 이 땅에 처음 들여왔는지, 그 사람이 조선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오랫동안 묻지 않았다. 이번 step.log에서는 그 질문의 답을 품고 있는 곳, 강원도 고성 화진포의 셔우드 홀 문화공간을 소개한다.


화진포에는 크리스마스 씰의 시작을 기억하는 공간이 있다


셔우드 홀 문화공간은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길 278에 있다. 화진포 생태박물관으로 쓰이던 건물을 고쳐 2025년 6월 19일 문을 열었다. 이 공간이 화진포에 들어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김일성 별장'으로 알려진 '화진포의 성'이 본래 셔우드 홀이 세운 선교사 휴양소였기 때문이다.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눈여겨볼 곳이 두 군데 있다. 첫째는 야외 석판 연대기 벽이다. 셔우드 홀의 생몰일과 1932년 첫 크리스마스 씰 도안이 새겨져 있고, 홀 가족 2대의 행적이 간추려져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기 전에 이 가족이 조선에서 걸어간 길을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 둘째는 크리스마스 씰 모양의 포토존이다. 화진포호를 배경으로 서 있어 풍경과 함께 사진을 남기기 좋다. 윌리엄, 로제타, 메리언, 셔우드 네 사람이 한 프레임에 담겨 있고, 결핵 퇴치 운동의 상징인 복십자도 함께 새겨져 있다. 씰 한 장 안에 두 세대의 사역이 담긴 셈이다.


1층은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간 홀 부부의 소명을 증언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홀 가족이 고국을 떠나 먼 조선에서 어떤 짐을 졌는지 1층부터 차례로 따라갈 수 있다. 1층은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의 공간이다. 전시는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에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해라." 이 말은 미국 마운트 홀요크 여자신학교를 세운 메리 라이언(Mary Lyon)이 남긴 것으로, 젊은 로제타의 마음을 움직여 조선으로 이끈 문장이다. 이 문장 앞에서 필자는 그들의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그리고 그 길이 얼마나 값졌는지를 함께 떠올렸다.
 
윌리엄 홀은 1894년 청일전쟁의 부상자와 환자를 돌보다 병을 얻어 그해 11월 조선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들 셔우드가 겨우 첫돌을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로제타는 슬픔에 주저앉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시작한 의료 선교를 홀로 이어 갔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소명은 형편이 좋을 때만 붙드는 직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를 고난 속에서도 떠나지 않는 신실함이다. 로제타의 삶은 그 소명의 무게를 보여준다.
 
로제타는 처음으로 한글 점자 교재를 만들어 시각장애인 교육의 문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1층에는 그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가르친 기록이 펼쳐진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김점동)를 가르치고 후원한 이야기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먼저 찾아간 부부의 발자취가 1층 전시를 채운다.


2층의 청진기는 조선의 심장과 함께 뛰었다

1층을 지나 2층에 오르면 두 사람의 아들 셔우드 홀을 만난다. 전시관 입구 벽에 그의 말이 새겨져 있다. "나의 청진기로 조선 사람들의 심장을 진찰할 때면 내 심장도 조선과 함께 뜁니다." 이 한 문장이 그가 조선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증언한다.
 
2층에는 그의 진료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 책상과 영사 장비, 해주의 옛 풍경을 담은 창이 그의 하루를 눈앞에 그려 보인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뱀탕을 결핵 특효약으로 여겼다고 한다. 셔우드 홀은 이런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으려고 영사기와 환등기로 공중위생을 가르쳤다. 그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봉사자가 아니었다. 조선 사람들이 올바른 의학 지식으로 스스로 건강을 지키기를 바랐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의술을 비롯한 학문과 기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가르쳤다. 셔우드 홀의 손에서 그 선물은 이웃 사랑의 도구가 되었다.
 
결핵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크리스마스 씰을 도입한 그의 노력도 이곳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사역을 이어 가던 그는 결국 1940년 스파이 혐의를 쓰고 조선에서 추방되었다.
 
2층의 마지막 공간은 홀 가족의 묘비를 재현한 추모 공간이다. 실제 묘비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다. 묘비에는 윌리엄과 로제타, 셔우드, 그리고 세 살에 조선에서 숨진 딸 에디스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로제타는 1951년 4월 5일에, 셔우드는 1991년 4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40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날이다. 묘비 아래쪽에는 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Whether we live, or die, we are the Lord’s.”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옮긴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로마서 14:8, 새번역). 홀 가족의 삶과 죽음은 모두 이 고백 위에 서 있었다. 추모 공간 영상에 흐르는 기도문도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내가 아니라 내가 인생에서 뿌린 씨앗이 후세에 전해지게 하소서"

3층의 첫 크리스마스 씰은 거북선 대신 숭례문을 품었다

3층은 셔우드 홀이 결핵 퇴치를 위해 들여온 크리스마스 씰의 역사를 보여준다. 1932년 첫 크리스마스 씰부터 1940년 셔우드 홀이 추방될 때까지 발행된 씰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 크리스마스 씰에는 사연이 있다. 셔우드 홀은 처음에 조선인의 자랑인 거북선을 그려 넣으려 했다. 거북선의 포가 결핵을 겨누어 무찌른다는 뜻을 담은 도안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저항 정신이 담겼다는 이유로 이 도안을 허가하지 않았고, 결국 숭례문 그림으로 바뀌었다. 거북선 도안은 35년이 지난 1967년에야 크리스마스 씰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의 결핵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기부라는 개념이 낯설던 시절이라 씰을 약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씰을 가슴에 붙이고 셔우드 홀을 찾아와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2층의 뱀탕 이야기와 나란히 놓고 보면, 셔우드 홀이 맞서 싸운 대상은 결핵균만이 아니라 무지와 두려움이었다.
 
3층에서는 지금까지 발행된 다양한 크리스마스 씰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모으던 씰들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 더욱 반가웠다. 요즘의 씰은 우표 옆에 붙이는 종이에 머물지 않고 여러 상품에 담겨 모금에 쓰인다. 셔우드 홀이 뿌린 씨앗이 형태를 바꾸어 지금도 자라고 있다.


화진포의 성은 두 개의 이름으로 선교의 수난을 증언한다

셔우드 홀 문화공간의 입장권으로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는 화진포의 성이다. 이 건물은 1938년 선교사 휴양소로 세워졌다. 일제가 원산 해변의 선교사 수련원을 강제로 철거하자, 셔우드 홀이 화진포에 새 휴양소를 마련한 것이다. 독일인 건축가 H. 베버가 지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선교사들의 휴양소이자 예배 처소로 쓰였다. '화진포의 성'이라는 이름도 셔우드 홀이 붙였다.
 
그러나 이 집은 오래 선교사들의 것으로 남지 못했다. 1940년 셔우드 홀이 추방되면서 그의 손을 떠났고, 광복 후 이 지역이 38선 이북에 들자 북한이 귀빈 휴양소로 사용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김일성 가족이 여름 휴양지로 쓰면서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제가 원산의 수련원을 빼앗았듯, 화진포의 성도 다시 빼앗긴 것이다.
 
지금 서 있는 건물은 셔우드 홀이 지은 원래의 건물이 아니다. 1964년 육군이 옛 건물을 철거하고 다시 지었다. 1995년 개·보수를 거쳐 장병들의 휴양 시설로 쓰이다가, 1999년 7월 전시관으로 문을 열어 지금에 이르렀다.
 
한 건물에 두 개의 이름이 붙어 있다. 하나는 선교사가 붙인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이 덧씌운 이름이다. 이 건물은 선교사들이 일제강점기와 광복, 분단과 전쟁을 지나며 얼마나 험한 땅에서 사역을 이어 갔는지를 말없이 증언한다. 성벽 너머로 화진포 해변과 금구도가 내려다보인다. 셔우드 홀이 보았을 그 바다는 지금도 그대로다. 이곳을 그저 바다 전망이 좋은 별장으로 지나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씨앗을 심은 이는 사람이지만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윌리엄 홀과 로제타 홀, 그리고 셔우드 홀과 메리언 홀까지, 홀 가족이 이 땅에 남긴 발자취는 깊고 넓다. 그들은 편안한 고국의 삶을 내려놓고 척박한 조선으로 와서 가장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찾아갔다. 일제강점기의 압박과 추방,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모두 지나면서도 그 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헌신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2층 추모 공간의 기도문이 이미 답을 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뿌린 씨앗이 남기를 구했다. 이 기도는 바울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전서 3:6, 새번역). 홀 가족이 심은 씨앗을 이 땅에서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우리가 먼저 높여야 할 이름은 홀 가족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시고 끝까지 붙드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 바울은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로마서 13:8, 새번역)라고 권한다. 사랑의 빚은 갚아서 없애는 빚이 아니라, 또 다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 가는 빚이다. 이제 그 사랑을 이어 갈 차례는 우리에게 있다. 홀 가족이 그러했듯,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과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 앞에서 우리 또한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야 한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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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일상을 잇는 기록. 작은 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삶의 깊이를 나누는 온라인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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