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적이 남는 자리 — 5월, 무대와 전시가 새기는 한 단어들 | 문화 예술 공연 소식
4월의 부활이 지나가고, 5월이 들어선다. 기독교인에게 5월은 가정을 생각하는 달이자, 부활 이후 50일을 건너 성령강림을 향해 가는 달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이 자주 가는 시간. 그 흐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이번 달 무대와 전시에는 '새기다'와 '남기다'를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모여 있다.
기독교 무대 한 편, 일반 무대 한 편, 일반 전시 두 편. 형식도 장르도 다르지만, 읽다 보면 이 모든 자리가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사람이 새긴 한 단어가 38년을 버티게 했다는 것, 한 사건이 던진 한 질문이 백 년을 건너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라질 풍경을 붙드는 손이 여전히 우리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 감옥 돌에 새긴 한 단어 — 뮤지컬 〈저항: 찬송이 된 사람들〉

광야아트미니스트리 창립 20주년 기념작이자 종교개혁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이 한 줄이 이 공연의 무게를 말해준다. 광야는 지난 20년간 〈요한계시록〉, 〈더 북: 성경이 된 사람들〉, 〈루카스〉 같은 작품으로 한국 기독교 문화예술의 지평을 넓혀왔다. 그 여정을 집약하면서, 동시에 다음 20년을 가리키는 작품이 이번 신작이다.
작품의 무대는 1730년 프랑스 남부. 열아홉 살의 마리 뒤랑은 '위그노'라는 이유 하나로 악명 높은 콩스탕스 탑에 던져진다. 죄목은 단 하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달콤한 유혹이 찾아온다 — "신앙을 버린다고 한마디만 해라. 그러면 당장 이 지옥을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마리는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빵 대신 날카로운 돌을 들어 한 단어를 새긴다. 레지스테(Résister, 저항하라). 그 한 단어가 마리를 38년 동안 그 자리에 붙들었다.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다. 흔들리고, 분노하고, 좌절하면서도 끝내 신앙을 놓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삶은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라, 모든 상황 속에서.”
작품은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장 조병수 목사의 학술 자문을 거쳐 고증의 깊이를 더했고, 비기독교인 시각에서 출발한 오루피나 감독은 마리를 영웅이 아닌 한 인간으로 그려낸다. 종교적 신념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그 38년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그 흔들리는 마음을 무대 위로 천천히 옮긴다.
성령강림주일이 머지않은 5월에 이 무대에 앉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박해 속에서 찬송이 된 사람들의 자리에 잠시 함께 앉는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이 시대에 우리가 '아니요'라고 말해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 무엇이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찬송으로 만드는지를 다시 묻게 된다.
< 공연 정보 >
- 공연 장소: 광야아트센터 (서울 강남구 청담동, 압구정로데오역 4번 출구)
- 공연 기간: 2026년 4월 10일(금) ~ 10월 31일(토)
- 공연 시간: 월·화·금 오후 7시 30분 / 수 오후 2시 / 토·공휴일 오후 2시·6시 (목·일 휴연, 5/1·5/4 휴연)
- 티켓 정보: 일반석 50,000원 / 발코니석 35,000원
- 러닝타임: 약 115분 (인터미션 없음) / 8세 이상 관람
- 예매 정보: 광야아트센터 홈페이지 / 문의 02-741-9182
2. 한 사건이 묻는 다섯 사람의 진실 —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장편이자 그의 사상이 모두 모이는 책이다. 1500쪽이 넘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무대 위로 옮긴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방대한 서사를 단 한 사건인 아버지 살인을 중심으로 형제들의 신념과 욕망과 갈등으로 응집해낸 창작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가 5월 12일 대학로 무대에서 새 시즌을 연다.
평생을 탐욕과 방탕 속에서 살아온 아버지 표도르가 죽는다. 사건의 그림자 안에 네 명의 아들이 서 있다. 거친 욕망과 충동의 장남 드미트리, 무신론적 회의로 무장한 차남 이반, 신앙을 통해 형제 간의 균열을 중재하려는 막내 알료샤, 그리고 가문의 사생아이자 하인인 스메르쟈코프가 있다. 이반이 던진 한 문장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그리스도인이 이 무대를 만난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도스토옙스키가 심어둔 알료샤, 스타레츠 조시마, 시베리아 광야의 빛은 회의의 한복판에 놓인 신앙의 증인들이다. 작품은 한 가족의 비극에서 그치지 않고, 신을 묻는 인간 전체의 초상으로 확장된다. 무대는 그 초상을 정면에서 마주 보게 한다.
원작을 읽지 않은 분에게도 진입 문턱이 높지 않다. 갈등의 밀도는 팽팽하지만 서사는 명료하다. 다만 원작을 먼저 읽은 분이라면, 그 무게를 다시 가늠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시즌은 1차 캐스트가 7월 12일까지, 2차 캐스트가 7월 14일부터 9월 6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 공연 정보 >
- 공연 장소: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투자증권홀
- 공연 기간: 2026년 5월 12일(화) ~ 9월 6일(일)
- 티켓 정보: VIP석 88,000원 / R석 77,000원 / S석 66,000원 / A석 55,000원
- 예매 정보: NOL 티켓
3. 사라질 풍경을 수채화로 붙드는 일 — 성률 기획전 〈여름을 닮은 우리〉

올여름 한남에 작은 비밀스러운 그늘 하나가 생긴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회화 작가인 성률의 첫 대규모 기획전 〈여름을 닮은 우리〉가 그라운드시소 한남에서 열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를 졸업한 그는, 그래픽 노블 『여름 안에서』(문학동네, 2020)로 한국인 최초로 일본국제만화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가다. 백예린, 이하이 같은 아티스트의 앨범 커버에서도 그의 손길을 만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그리는 것은 사라질 운명의 공간들이다. 수채로 번지는 화면 안에는 한낮의 골목, 햇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모서리, 어디선가 본 듯한 이국의 풍경이 떠오른다. 정교한 붓 터치와 불규칙하게 번지는 물감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면서도 어딘가 익숙하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대신 그리는 시대에, 작가는 한 장의 종이 위에서 천천히 시간을 붙든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일과, 추억의 가치를 기억하는 일이라는 이 두 자리 사이에 그의 화면이 놓여 있다.
이번 전시는 『여름 안에서』의 원화부터 새롭게 시도한 대형 수채화, 아크릴 작업까지 100여 점이 모이는 자리다. 따가운 여름 햇볕과 그 위로 드리우는 서늘한 그늘이 느껴진다. 그 양 끝의 감각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작가의 작업 앞에서, 관객은 자기 안에도 그런 풍경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
5월의 문턱에서 문을 여는 이 전시는, 곧 다가올 여름을 한 박자 앞당겨 미리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빠르게 잊히는 것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느리게 그리고 있다.
< 전시 정보 >
- 전시 장소: 그라운드시소 한남 (서울 용산구)
- 전시 기간: 2026년 4월 30일(목) ~ 8월 31일(월)
- 티켓 정보: 20,000원
- 예매 정보: 인터파크 NOL 티켓, 네이버 예약
4.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 키크니 특별전 〈그렸고 그런 사이〉

121만 명.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다. 일러스트레이터미네이터 키크니는 9년의 프리랜스 일을 거쳐 번아웃을 만나고, 그 끝에서 SNS 위에 한 컷 만화를 올리기 시작했다. 댓글로 들어오는 사연들에 답하는 형식이다.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그 짧은 약속이 어느새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일상을 묶어냈다.
작가의 첫 대규모 단독 전시 〈그렸고 그런 사이〉가 4월 25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막을 올렸다. 전시장은 만화 안의 세계를 그대로 통째로 옮겨놓은 듯하다. 400평의 공간이 12개 섹션으로 나뉘어, 그림과 영상은 물론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입체 조형물까지 무대처럼 펼쳐진다. 거대한 키크니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누군가의 사연을 어떻게 그릴지 고민하는 모습 그 자리에서부터 관객의 동선이 시작된다.
작품 안의 세상은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전혀 모르는 타인과 주고받은 무수한 말들로 가득하다. 세상살이에 지친 어느 날 누군가 건넨 한마디에 마음이 풀어지던 순간들이다. 작가가 댓글 위에 그린 한 컷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그 위로가 다시 다른 댓글이 되어 작가에게 돌아오는 그 작은 순환이 이 작품 세계를 8년 동안 움직여 왔다. 가정의 달 5월에 이 전시는 의미가 한 결 더해진다. '사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 무게를 지닐 수 있는지를 새삼 보여주는 자리다.
우리는 엽서 한 장의 손글씨가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기도 한다는 그 사실을 종종 잊는다. 키크니의 만화는 그것을 부드럽게 다시 일깨운다. 빵 터지는 한 컷과 마음이 오래 남는 한 컷 사이에서, 그가 쌓아온 무수한 '사이들'이 지금 한자리에 모여 있다.
< 전시 정보 >
- 전시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전시1관 (서울 중구 을지로)
- 전시 기간: 2026년 4월 25일(토) ~ 9월 6일(일)
- 운영 시간: 매일 오전 10시 ~ 오후 8시 (휴무 없음)
- 티켓 정보: 성인 22,000원 / 청소년 15,000원 / 어린이 13,000원
- 예매 정보: 인터파크 NOL 티켓, 네이버 예약
마무리하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5월의 기독교인은 두 개의 풍경을 동시에 산다. 가정을 기념하는 달과 부활 이후 50일을 건너 성령강림을 향해 가는 달이다. 그러니 이 달의 작품들 앞에서도 우리는 다른 결의 시선을 가진다. 감옥 돌에 한 단어를 새긴 한 사람의 고백 앞에서, 신을 두고 다투는 다섯 형제의 식탁 앞에서, 사라질 운명의 풍경을 붙드는 수채화 한 장 앞에서, 백만 명이 한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보낸 무수한 사연들 앞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자리에 앉든, 그 자리에 먼저 새겨진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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